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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 오픈
2020-05-27 15:34:00
영상통신부
조회수   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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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제일교회는 안식년 및 일시 귀국하신 파송(협력)선교사님들을 위해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였습니다. 기존 사택을 리모델링하여 103호, 201호, 202호, 203호, 204호실을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합니다. A형(룸1) : 1~2인 □ 202호(싱글2)/A-1 □ 202호(싱글1)/A-2 B형(룸2) : 3~5인 □ 103호(온돌) □ 203호 □ 204호 C형(룸3) : 6인이상 □ 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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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제일교회 창립 130주년 기념 감사예배 -투데이N- 2023-04-28 관리자

“주님의 길,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주제로 130주년 기념 사업 풍성
증경총회장 이성희 목사 “대구제일교회, 사도행전적 교회로 이어나가길”
16일 잔치 한마당, 아름다운 가게, 사진 전시회 개최
네팔 심탈리대구제일교회 헌당, 몽골해외선교사 파송 임명

대구제일교회가 창립 제130주년 감사예배 - 영남일보- 2023-04-28 관리자

대구제일교회가 창립 제130주년 맞아 지난 16일 대구 중구 제일교회 본당에서 '주님의 길. 계속 이어가겠습니다!'를 주제로 감사예배를 열었다.

[차 한잔] 박창운 대구제일교회 목사 "하나님의 은혜로 온 130년…헌신하는 마음으로" -매일신문- 2023-04-28 관리자

1893년 베어드 선교사 설립…박해 무릅쓰고 개신교 첫 발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 기초…복음 전할 몽골 선교사 파송
박 목사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힘 나눌 것”
국내 최고(最古) 당회록 번역발간 등 기념사업 진행

[교회] 대구제일교회, 창립 130주년 기념 감사예배 -한국장로신문- 2023-04-28 관리자

대구제일교회(박창운 목사 시무)는 지난 4월 16일 대구제일교회 본당에서 성도 및 내빈, 모(母) 교회 방문자 등 5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13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감사예배는 박창운 위임목사의 인도로 경북노회장 이준엽 목사 기도, 김일룡 은퇴장로 성경봉독, 시온찬양대 찬양, 증경총회장 이성희 목사가 ‘사도행전적 교회’ 제하 말씀, 130주년 기념 축하 영상 시청, 영남대학교 한용희 교수 특송, 몽골 파송선교사(양인목 목사) 임명식, 상주교회 곽희주 원로목사 축사, 준비위원장 이승환 장로 인사 및 광고, 증경총회장 이성희 목사가 축도했다.

 

축하 시간에는 성전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촬영한 후 식당에서 홈커밍데이 행사를 개최하면서 이승환 장로의 진행으로 박창운 위임목사의 기념 케이크 점화, 이화석 원로장로 기도, 케이크 커팅, 내빈소개에 이어 제일교회 출신 목사 및 전도사 등 과거 제일교회에서 사역하셨던 20여 명의 초청 사역자에게 소감을 들으면서 뜻깊은 행사를 개최했다.

박창운 위임목사는 “130여 년 전 이국땅 내륙 지방인 대구에서 선교의 희생으로 첫 열매를 제일교회에서 맺게 되었으며,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음을 고백한다”면서 “신앙 선조들께서 걸어오신 길을 돌아보며 새로운 비전을 일구어 나가기를 소망한다”라고 했다.
13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장 이승환 장로는 “주님의 길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라는 주제로 창립 13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대구지사장 이상호 장로

대구제일교회 창립 130 주년 기념 감사예배 (대구, 배진우) l CTS뉴스 2023-04-27 관리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대구제일교회는 창립 13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를 전한 증경총회장 이성희 목사는 "대구제일교회와 성도들이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처럼 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어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날 대구제일교회 출신 목회자 등 참석자들은 130년 역사를 만들어온 믿음의 선배의 뜻을 받아 "주님의 길을 계속 이어나가겠다 "고 다짐했습니다.

INT 박창운 목사 / 대구제일교회 대구제일교회는 130 년 동안 익었다 깊어졌다라고 생각합니다 130 년 동안 섬겨왔던 우리 교회 앞날도 계속해서 잘 섬겨나가겠습니다

그래서 대구를 더욱더 주님 품 안에 안기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대구제일교회는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해외교회 개척과 선교사 파송 등 선교 사역을 펼쳤고, 창립 축하 "잔치한마당 "과 "사진전시회", 홈커밍데이 등 지역 사회와 성도를 위한 다채로운 기념 행사도 진행했습니다.

 

 

대구제일교회 창립 130주년 기념감사예배 드려, 담임 박창운 목사 -대구CBS- 2023-04-25 관리자

1893년 4월 22일에 설립된 대구·경북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담임 박창운 목사)가 창립 130주년을 맞아 기념예배를 4월 16일 (주일) 오후 3시 대구제일교회 본당에서 열었다.

대구제일교회는 130주년을 맞아 홈커밍데이도 함께 진행했으며, 교회 로비에서는 130주년 기념 사진전도 열어 대구·경북 기독교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장소도 마련했다.

이날 열린 감사예배는 박창운 목사(대구제일교회)의 인도, 이준엽 목사(경북노회장)의 기도, 김일룡 은퇴장로(대구제일교회)의 성경봉독의 순서를 가졌으며, 시온찬양대의 찬양의 순서로 채워졌다.

이성희 목사(증경총회장)가 사도행전 28장 30절~31절 말씀을 본문으로 '사도행전적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는 "대구제일교회가 130년을 넘어 하나님명령을 실천하는 구원 사역, 사도행전적 사역을 잘 감당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한용희 교수(영남대학교)의 특송, 특별히 130주년 기념, 이성희 목사(증경총회장)의 축도로 감사예배를 마무리했다.

특별히 이번 130주년 기념으로 12월에 파송하는 양인모 목사(대구제일교회)의 몽골선교사 파송을 위한 임명식도 거행되었다.

[인터뷰] 박창운 목사(대구제일교회) (130년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익어가고 있다,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익어가고 있다는 것, 또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130주년을 그렇게 달려왔기 때문에, 앞날도 우리가 계속적으로 섬길 것입니다.

예배 후 지난 대구제일교회를 거쳐 간 교역자들이 한 곳에 모여 홈커밍 축제를 가졌으며,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대구·경북 최초의 당회록, 세상에 나오다!', 임병규 장로(대구제일교회130년사 출판위원장) -대구CBS- 2023-04-25 관리자

제목: 대구·경북 최초의 당회록, 세상에 나오다!

진행: 박준상 아나운서

출연: 임병규 장로(대구제일교회 130년사 출판위원장)

내용: 대구·경북최초 당회록 번역 책자 발간

방송일: 4월 14일 (금)

 

 

스마트교인증에 의한 교회출입 2020-06-08 영상통신부 교회 입장 시 스마트폰 앱에 의한 교인확인증으로 문진표 작성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는 원활한 입장 및 이단에 대한 경계를 위하여 준비하였습니다. 교적에 등록된 휴대폰 사용자만 설치할 수 있어 개인 정보 유출의 위험은 없습니다. 아직 설치하지 못한 성도들은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참조하시고, 설치가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교회 마당에서 설치를 도와드리고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성도들과 사용이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교회앞마당에서 종이바코드교인증을 배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교인증이나 요람에 사진이 없는 성도들께서는 행정실이나 이메일(2532615@hanmail.net)로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7일 주일부터는 열화상카메라에 의해 체온이 측정되어 더욱 신속한 교회 출입이 가능해 졌습니다. 게스트하우스 오픈 2020-05-27 영상통신부 대구제일교회는 안식년 및 일시 귀국하신 파송(협력)선교사님들을 위해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였습니다. 기존 사택을 리모델링하여 103호, 201호, 202호, 203호, 204호실을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합니다. A형(룸1) : 1~2인 □ 202호(싱글2)/A-1 □ 202호(싱글1)/A-2 B형(룸2) : 3~5인 □ 103호(온돌) □ 203호 □ 204호 C형(룸3) : 6인이상 □ 201호 말씀안에서 삶을 나누는 청장년부 2020-01-17 영상통신부 올해부터 청장년부와 중년부가 통합되어, 교회의 허리라고 볼 수 있는 연령대인 35세 ~ 55세의 청장년층의 성도들이 매주일 오후 1시30분부터 2시30분까지 100주년 기념관 2층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소그룹 활동을 통해 교제를 나누고, 개인의 신앙 성장과 더불어 교회의 성장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많은 기도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2020년 안수집사회 신년교례회 2020-01-14 영상통신부 2020년 1월 12일 주일 오후 4시 30분 100주년 기념관 5층 식당에서 '안수집사회 신년교례회'를 가졌습니다. 임원인사 소개와 신임회원의 인사, 박근배.송민태집사의 축하찬양순서가 있었습니다 온세대예배 2019-05-17 영상통신부 5월12일 어버이 주일 주일2부예배(오전 9시 30분)는 영아로부터 장년까지 함께 예배드리는 온세대 예배로 드리오니 드렸습니다 제일바이블 아카데미 2019-03-06 관리자 3월 4일(월) - 8일(금) 오후 7시 30분 에 본당 지하1층 아담스홀에서
“현대사회의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이라는 주제로 제일바이블 아카데미가 진행되었습니다.
이상근, 신·구약에 외경까지 방대한 성경 주해…한국 개신교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 2018-10-10 관리자 [그의 삶 그의 꿈]
이상근, 신·구약에 외경까지 방대한 성경 주해…한국 개신교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
<56> 복음의 파종자 이상근 목사
2018.08.27

정류(靜流) 이상근 목사는 목회자이자 신학자, 교육자로서 대구ㆍ경북은 물론이고 나아가 한국 개신교계를 이끈 선구적 지도자였다.
정류(靜流) 이상근 목사는 목회자이자 신학자, 교육자로서 대구ㆍ경북은 물론이고 나아가 한국 개신교계를 이끈 선구적 지도자였다.
자서전 ‘등대가 있는 외딴 섬’. 고인의 뜻에 따라 소천 3년후 출간 됐다.
자서전 ‘등대가 있는 외딴 섬’. 고인의 뜻에 따라 소천 3년후 출간 됐다. 정류(靜流) 이상근(李相根) 목사는 대구ㆍ경북을 넘어 한국 개신교계의 대표적 지도자였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3월5일(음) 대구시 중구 인교동 98번지에서 이연우(李淵雨)ㆍ서부잡(徐扶雜) 부부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대구 수창보통학교 졸업후 6학년때 선생님 주선으로 일본인 상점에서 일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강의록을 사서 중학과정을 독학했다.
점원 생활은 1년 채 안됐다.
15세때 친구따라 대구 중앙교회 수요예배에 처음 참석했다.
이후 모든 공적 예배와 주일에만 있는 새벽기도회까지 출석했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었다. 당시엔 정규 새벽 기도회가 없었다.
새벽 기도를 하고 싶었던 그는 집에서 3km 정도 떨어진 호젓한 곳을 기도처로 정했다.
40일 작정 기도후 60일 더 늘렸다.
어느 날, 오른발이 철사에 찔리는 사고를 당했다.
통증을 참고 100일을 채웠다.
수년간 병치레를 했다.
좀처럼 낫지 않았고, 발은 기형으로 변해갔다.
부모님도 믿음을 갖게 됐다.
“급하고 불같은 성격의 아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신앙을 갖게 되신거지요.” 부인 설귀연(薛貴蓮ㆍ93)씨의 회고다.
청년 상근은 어머니가 출석하는 서문교회에서 주일학교와 부설 야간학원 교사로 봉사했다.
요양차 집을 떠나 평리동의 초가에서 모자가 함께 지내며 닭과 토끼를 기르고, 초등학교 수준의 야학도 열었다.
그즈음 동산기독병원에서 초가집 두 채에 평리교회를 세웠다.
부근의 개신교 가정인 설씨 집안의 딸 귀연과 함께 서문ㆍ평리 두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청년 이상근의 평양시절

목회의 꿈을 품은 청년 상근은 1940년 대구 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교육프로그램과 학년이 대폭 축소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당시 일본 총독부의 ‘전문학교 입학자 검정시험’(전검시험)에 합격하면 5년제 중학 졸업자격이 주어졌다.
밤낮없이 강의록을 파고들었다.
시험 당일 39도까지 오른 고열로 두 차례 시험에서 12과목 중 6과목만 통과됐다.

평양신학교는 중학 졸업자가 아닌 경우 예과 2년 후 본과(3년)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예과에 응시한 상근은 검정시험과 본시험에서 모두 최고 성적을 받았다. 덕분에 본과에 입학하게 됐다.
5년 과정을 3년에 마치게 됐으니 행운이었다.

졸업반이던 1944년, 설귀연과 결혼했다.
평생의 동반자이자 신앙의 동역자였다.
그는 자서전 ‘등대가 있는 외딴 섬’에서 “나의 건강과 목회는 거의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덕”이라며 고마워했다.
졸업때는 우등상을 받았다.
이듬해(1945) 목사 안수를 받고 평양신학교의 종교 교육목사로, 또 장대현 교회의 주일학교 부감을 겸임했다.

◆월남과 목회 활동

상근은 1946년 3월, 월남했다.
시무하던 능라도 교회 신자들의 전송을 받으며 기차에 올랐다.
황해도 사리원에서 경변차를 바꿔타고 학현이란 곳에서 내렸다.
아내는 생후 6개월의 장남을 업고, 상근은 동료 목사의 아이 하나를 업었다.
아픈 발로 60리를 걸어갔다.
달빛을 피해 가던 중 민청대원에게 붙잡혔다.
평양역에서 제자가 건네준 피난민증을 보여주고 풀려났다.
다시 40리를 걸어 38선을 넘은뒤 20리를 더 걸어간 곳에서 미군들을 만났다.
대구역에 내렸을 때는 새벽 4시경, 절룩이며 찾아간 고향집에는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생사가 갈릴뻔한 위기도 겪었다.
남로당 등 좌익들로 인한 1946년의 ‘대구 10ㆍ1 폭동사건’때도 그랬다.
당시 칠곡군 인동면 옥계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폭도들이 목사를 잡으러 온다는 소문이 돌더니 100여 명이 교회를 포위했다.
상근을 잡아끌며 인동 민청으로 가자고 했다.
투옥에 대비해 한복으로 갈아입고 부부는 기도를 했다.
빨리 나오라는 폭도들의 고함 속에서도 기도를 한뒤 밖에 나오니 그들이 없었다.
경찰대의 인동 진입 소식에 달아났다는 것. 폭도들이 그를 인동 민청이 아닌 동네밖에서 사살하려 했음도 알게 됐다.

1952년 연말에도 아찔한 순간을 만났다.
청송 화목교회 부흥회 인도차 시외버스를 타고 가던중 노귀재에서 무장 빨치산들을 만났다.
승객들을 하차시키고 버스를 불태우더니 산속으로 끌고가 심문했다.
모두들 벌벌 떨었다.
상근의 차례때 목사임을 밝혔다.
갑자기 그들이 능선쪽으로 가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청송 경찰대가 출동했던 것이다.
모두가 달아났다.
청송쪽으로 산을 넘던 상근은 큰 고추부대를 이고 진 여인과 마주쳤다.
얼른 부대를 버리고 도망치라 했지만 놓으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상근은 고추부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여인의 팔을 잡아끌며 산을 내려갔다.
뒤따라온 빨치산이 가난한 시골부부로 봤던지 해치지 않았다.
버스 승객들 중 헌병과 경관이 피살됐다.

대구 대봉교회 목회시절 사택 앞에서 미소짓는 젊은 날의 이상근 목사 부부(1956년).
대구 대봉교회 목회시절 사택 앞에서 미소짓는 젊은 날의 이상근 목사 부부(1956년).

1948년 6월부터는 대구 남산교회 전도목사로서 대봉교회 개척에 나섰다.
신자들이 모여들어 두 번이나 증축했지만 그래도 좁아서 옆의 채소밭 300평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매일 새벽기도회며 주일 낮과 밤 예배를 혼자서 인도했다.
오전엔 성경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심방을 했다.
대구대학(영남대 전신)에 편입해 영문학 공부까지 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미국 유학 길에 오르다

1995년 뉴욕신학대의 ‘파종자상(Sower Award)’ 시상식에서의 이상근 목사 부부. 이 대학 최고의 상이며, 동양인으로는 첫 수상자였다.

1953년 9월, 이 목사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미국유학. 미국 군수물자를 싣고 온 화물선을 타고 3주간 항해 끝에 시애틀에 도착했다.
동부 뉴잉글랜드 프라비덴스의 성서대학에서 한 학기동안 어학공부를 한뒤 뉴욕 비브리컬 신학대(현 뉴욕신학대)에 입학했다.
1년6개월 후, ‘요한복음의 부성관(父性觀)과 대승불교의 신관’ 주제 논문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곧바로 귀국해 대봉교회 담임목사, 대구 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 목사는 학문에 대한 갈증이 컸기에 2년후(1957) 미국 댈러스 신학대로 두 번째 유학을 떠났다.
부담감으로 위장병을 얻기도 했지만 2년만에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과 대승불교의 불타론’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라 하와이 열도의 미드웨이 해군기지를 지날 때, 캄캄한 어둠 속 외딴 섬에서 홀로 불 밝힌 등대가 뭉클한 감동으로 와닿았다.
이후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면 그 외딴 섬의 등대를 떠올리며 새 힘을 얻곤 했다.
◆대구제일교회 목회와 성전 신축

약전골목의 제일교회 구 예배당(왼쪽)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0호이며, 지금의 성전은 이상근 목사 재임 말기인 1989년말 착공해 1994년 신축 이전했다.
1959년 7월 귀국후 제일교회에 다시 부임했다.
38세때였다.
두 번째 유학에 앞서 대봉교회에 사표를 낸뒤 반년간 제일교회에 시무했었다.
유학동안 새 후임을 청빙하지 않아 재부임하게 된 것이다.
지역 모교회답게 규모와 내실을 두루 갖춘 교회로 발전을 거듭했다.
이 목사의 설교는 영혼을 터치(touch)하는 힘이 있었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담긴 설교는 논리적이면서도 감동의 여운을 안겨주었다.
이상근 목사 연구자인 배재욱 영남신학대 교수는 “그분의 목회 중심은 신학이 있는 목회”이며 “언제나 성경 본문에 충실한 설교”라고 했다.

성전 신축도 주요 업적이다.
약전골목의 교회당은 교세확장으로 증축이 불가피해졌지만 개신교계의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마침 영남신학교가 경산으로 옮기면서 그 자리로 신축 이전하게 됐다.
1989년말 착공, 1994년 4월24일 입당예배를 갖게 됐다.
그사이 이 목사는 1991년 2월 34년 간의 시무끝에 은퇴했다.
원로목사로서 창립 101주년 기념예배이자 새 성전 입당예배 설교를 하면서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20여 년을 성경 주해에 매달려
1955년 대구 고등성경학교 새 교사 헌당식에서. 왼쪽부터 감부열(아치볼드 캠벨) 선교사, 이상근 교장. 안두화(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

어느 해 봄날, 증경 총회장들과 함께한 이상근 목사(앞줄 왼쪽 두 번째). 한경직 목사(왼쪽 네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이상근 목사는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다.
방대한 성경 주해(註解)가 그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교역자들의 성경 연구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1960년 9월부터 ‘요한복음’ 주해를 시작했다.
건강때문에 하나를 끝내면 감사한 마음으로 또 하나를 시작했다.
과로로 앓아눕기도 허다했다.
1975년 1월31일, 꼬박 15년만에 12권의 신약 주해를 끝냈다.

10여 년이 흘렀다.
건강이 닿는한 구약 주해서도 한두권 쓸 요량으로 ‘창세기’부터 시작해 1993년 3월, 총 15권의 구약 주해를 끝냈다.
전후 총 집필기간 20여 년, 신ㆍ구약 주해서 27권. 내친김에 외경 주해까지 했다.
신ㆍ구약과 외경까지 모두 주해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예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이 목사는 교육자이기도 했다.
첫 유학에서 돌아온 1955년 대봉교회 목회와 대구 고등성경학교 교장직을 겸임했다.
이듬해, 개편된 영남신학교의 이사장과 교장으로 추대됐지만 첫 졸업식 후 바로 사임했다.
더 이상의 직분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유학후 제일교회 목회와 함께 영남신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1959년부터 1976년까지 17년. 후임 교장이 노회 분규로 사임하여 다시 5년간 교장직을 맡았다. 강의도 병행했다.
장로회 신학대에도 1961년부터 4년간 출강했다.
대구고등성경학교와 영남신학교, 장신대까지 제자였던 김영수(金永受ㆍ81) 목사는 스승을 회고했다.
“한마디로 성자같은 분이셨습니다.
어려운 학생들도 많이 도와주셨고요.”
발의 병은 몸의 ‘가시’이자 은혜였다.
19세때 치료가 됐지만 1~2년에 한번씩은 앓았다.
74세때 극심한 통증이 왔다.
수술 결과 발에서 제거한 부골 안에서 길이 1.5cm, 머리털 굵기의 철사가 나왔다.
무려 60년동안 고통을 안겨줬던 철사였지만 병상에서 성경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으니 그것이 자신을 ‘이상근 목사’로 만들어주었다고 자서전에 썼다.
이상근 목사는 교계 리더로서도 신망이 높았다.
두차례의 경북노회장, 총회 목사고시위원장, 총회 국제선교위원장,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신앙고백 제정위원장 등 중책을 맡았다. 영광스러운 선물도 주어졌다.
1995년 1월엔 평양신학교 후신인 장로회 신학대 총동문회로부터 ‘장한 동문상’을 받았다.
5월에는 뉴욕신학대의 ‘파종자상(Sower Award)’도 받았다.
이 학교가 제정한 최고상으로 동양인 수상자는 이상근 목사가 최초였다.

슬하의 4남매 중 뒤를 이은 차남 이성희 목사(70ㆍ서울 연동교회)는 오는 12월 원로목사 추대를 앞두고 있다.
평양 태생 해방둥이 이문희 장로(73)는 뉴욕에서 심리학 교수 및 뉴욕 노회장을 지냈고, 삼남 이경희는 뉴질랜드, 딸 이신희는 로스앤젤리스에서 살고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이기도한 이상근 목사는 뇌종양으로 1999년 6월1일 소천했다.
향년 79세. 칠곡 동명의 제일교회 부활동산내 정류의 묘비에는 믿음의 경주(競走)를 다한 자의 기도문 같은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 후서 4:7-8).
전경옥 언론인


연보
ㆍ1920년 대구시 중구 인교동 출생
ㆍ1932년 수창보통학교 졸업
ㆍ1944년 평양신학교 졸업
ㆍ1945년 목사 안수후 평양신학교 종교교육 목사 겸 장대현 교회 부목사
ㆍ1948~1957년 대봉교회 개척 및 목회
ㆍ1955년 미국 뉴욕 비브리컬 신학대 졸업(신학 석사)
ㆍ1955~1957년 대구 고등성경학교 교장 취임
ㆍ1956년 영남신학교 이사장 겸 교장 취임(제1회 졸업식 후 사임)
ㆍ1957년 대구제일교회 부임, 도미 유학
ㆍ1959년 미국 댈러스 신학대 졸업(신학 박사)
ㆍ1959~1976년 영남신학교 교장 겸 교수
ㆍ1959, 1965년 경북노회장 피선
ㆍ1960~1975년 신약 주해서 12권 집필 완료
ㆍ1974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피선
ㆍ1991년 대구제일교회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
ㆍ1993년 구약 주해서 15권 집필 완료
ㆍ1999년 6월 1일 79세로 영면
<배재욱 목사 제공>
출처 -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대구제일교회 3개국서 여름철 해외선교 2018-09-13 관리자 "3일 동안 동남아 오지에서 100여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여름휴가는 날아갔지만 저의 몸과 마음도 날아갈 것처럼 가볍습니다."

대구제일교회(담임목사 박창운)는 여름 휴가철을 맞아 해외선교에 나섰다. 이번 행사는 해마다 펼쳐오던 국제선교, 비전투어 행사의 일환. 올해 해외 선교국은 모두 세 곳, 모두 54명의 신도, 재직자가 참여했다.

양인모 목사가 이끈 미얀마 선교에는 지난 달 26일부터 2일까지 모두 9명의 신도가 함께 했다. 선교일정은 '의료 선교' '어린이 사역' '한류 음식 홍보'로 나눠 6박 8일간 진행됐다. 선교단은 현지 어린이들을 상대로 종이접기, 그림 그리기와 리코더, 멜로디언, 탬버린 등 악기를 지도했다. 위생교육을 겸한 한류음식 홍보에는 주민들과 김밥, 김치, 반찬을 같이 만들며 음식과 친교를 나누었다.

의료팀은 하루 평균 30~40명 환자를 돌보며 구충제, 소화제 등을 처방했다. 진료에 나선 구미순천향대병원 우극현 교수는 "현지 주민들이 신장결석, 신경통, 위장질환을 많이 호소하고 있었다"며 "시간과 여력이 없어 근원 치료를 못해 준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스리랑카 선교팀도 3일부터 11일(토)까지 현지에서 의료봉사를 펼쳤다. 스리랑카 팀은 남부지역의 히카두와, 마스끼리, 해튼, 노우드를 돌며 8박9일 동안 현지 진료에 전력 했다. 이번 진료를 위해 의사, 치과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등 15명의 의료팀이 꾸려졌다. 의료진은 현지 교회, 학교에 임시진료소를 설치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우극현 교수는 "현지 자매교회에서 주민들이 고혈압, 두통, 충치, 관절염, 영양부족 등 증세가 많다고 미리 알려와 의료진들이 장비, 의약품을 준비해 맞춤형 진료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팀 외 이·미용, 어린이 사역팀이 함께 나서 주민들의 미용과 어린이 선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외 청년부의 태국선교팀 15명도 8일부터 15일(수)까지 태국 파야오에서 어린이, 청소년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단기선교를 진행한 양인모 목사는 "현지에서 의료 선교, 한류 홍보, 어린이 성경학교를 통해 창조주의 사랑를 같이 느끼게 돼서 좋았지만 그보다는 이교도들이 창조주의 섭리를 좇아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가 가장 기뻤다"고 말했다.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출처 -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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